퇴계 이황의 청량산
욕심쟁이 이황선생
이크 제목 잘못 뽑았당^^
퇴계 이황선생을 이야기 하는줄 알겠다
천만에
퇴계를 이야기 하라니
나더러 천지간의 섭리를 논하라 하는거와 무엇이 다르랴
내가 아는 퇴계님은 천원짜리 지페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면서도 웃도 아니한 모습 뿐이다
조금 더 안다면
여행을 하는 나로서
단양군수를 하면서 풍기군에 속해 있는 옥순봉을 글씨로 빼앗아 온 것 하고
풍기군수를 하면서 소수서원을 사액받고
봉화 청량산을 꼬불쳐 놓고 혼자 즐겼다는 거..ㅎ
?凉山 六六?을 아는이 나와 百鷗
百鷗야 喧辭(훤사)하랴 못믿을손 桃花로다.
桃花야 뜨지마라 魚舟子 알까 하노라
청량산 육,육봉(12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百鷗) 너 뿐이니
백구 너야 의젓하니 소문안낼 것이고 문제는 저놈의 도화 꽃이로다
저 도화 꽃이 강물에 떨어지면 어부(고깃배)가 그걸 보고 육육봉을 알까 하노라.
이만하면 욕심쟁이라 해도 틀린표현은 아니듯..ㅎㅎ
퇴계 종갓집에서 들고 일어나면 큰일인데.....
약장사 때문에
태풍 4호 마니의 예보 때문에 해약자가 속출하여 30 명을 못 채우고 새벽 5 시 출발한다
경북 봉화 청량산은 멀다
그래서 새벽잠 깨어 떠난다
태풍 ?
우리가 태풍 오는날 한 두번 산행해 봤는가?
정통으로 한반도 상륙이 아니면 태풍은 우리보다 더 빨리 통과하면서 습기와 더위를 밀어 내고 오히려 선선한 기운을 준다는 걸 안다
그래서 태풍예보가 있으면 산행하기 기차게 좋은날 ㅋㅋ
구마(邱馬)고속도로상의 칠서 휴계소에서 난데없는 약장사가 올라 타더니 엉터리 인삼주 반 병씩 나누어 주고는 지난번에도 들은 그 천마 약장사를 하며 함게 출발했다
그 약장수의 말솜씨는 우리가 잘 아는것
안듣는 척 하면서도 듣다가 웃고 하기도 한다
그러다 그만,
우리가 들어가야 할 남안동 내지는 서안동 IC를 지나쳐 버리고 만다.
그래서 다음 IC 영주로 들어가서 36호 국도를 타고가다 훨씬 북쪽에서 다시 35호 국도를 타고 안동 쪽으로 내려 오고 만다.
오히려 낙동강 상류의 아름다운 강변을 감상하는 멋도 좋았다
연 봉우리 속의 수술대 청량사
청량산 입산 들머리인 입석대 에서 하차한 시각이 10 : 30
들머리 시작은 나무계단으로 다듬어 놓았지만 이것이 더 힘들다는건 경험자는 안다
청량산을 볼려면 뭘 좀 알아야 겠기에 대충 안내를 찾아보니
<12봉과 12대>
12봉 : 장인봉, 외장인봉, 선학봉, 자란봉,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금탑봉,축륙봉, 등 12봉우리
12대 : 어풍대, 밀성대, 풍형대, 학소대, 금가대, 원효대, 반야대, 만월대, 자비대, 청풍대, 송풍대, 의상대 등 12개의 대(臺)
굴 : 김생굴.금강굴,원효굴,의상굴,방장굴 등
사찰: 예전에는 30여 절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외 청량사와 내청량사 뿐
완전히 둘러 볼려면 하루가 부족 할듯. 청량사를 거치는 코스로하여 최고봉인 장인봉(의상봉:870)을 오르고 하청량으로 출산하는 코스를 택함
여름 산행은 아무리 바위미가 뛰어난 산이라도 나무숲이 울창하여 조망이 수월하지 않은데
청량산은 산이 깊지 아니하여 조망이 좋았다
두 청량사(외청량사,내청량사)는 빼어난 봉우리 아래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고 높은 곳에서 조망이 좋았다
특히 내 청량사는 사방이 연꽃 봉우리 같이 암봉들이 둘러 싸여 있어 그자리가 딱 꽃의 수술 자리였다
고려말 공민왕이 여기까지 피신와서는 유리보전(琉璃寶殿) 이라는현판을 ?다 한다
청량사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또다시 계단길
원체 가파른 봉우리가 많으니 계단을 만들지 않으면 미끄러워 등반이 어렵겠다는 배려 이리라
한 봉우리를 헉헉대고 오르면 시원한 바람이 모자가 날릴정도로 분다
태풍이 지나가기 때문이 아니라도 바람이 많은듯 풍(風)자 붙은 대가 많다
12 봉 12 대를 다 가 볼수는 없고 안내도 상세하지 않으므로
최고봉 장인봉(의상봉)에서 낙동강의 구비 구비 도는 모양과 산과 산이 겹친 경치와
태풍이 막 지나간 푸른 하늘을 조망하며 하산한다
하산길의 산오디,산딸기며 어름을 따먹는 재미도 보면서
하산완료후(14:50) 그야말로 청량한 개울에서 탁족하는 맛도 느끼고..
도산서원
퇴계 이황의 산을 밟았으니 도산서원을 아니 찾으면 예가 아니지
도산서원 역시 지폐 1,000 원에 새긴 서원이다
낙동강에 강을 바라보면 공부를 하고 후학을 가르친 곳이다
입구의 300 년 된 왕버들 나무가 오랜 전통을 말해 주고 있다
34 세에 늦깍기 출사를 하고도 정파싸움이 싫어 지방군수 조금 하고는 판서도 싫다 하고
이 골짜기에서 후학을 가르치니 그 후학들이 당파싸움의 선봉에 쓰는 아이러니라니...
그러면서 벼슬 아니 한 남명 조식이 그렇게 부러웠다고 한다
퇴계나 남명이나 세상 꼬라지 돌아가는 꼴은 뵈기 싫었지만, 뒤에서 싸움 붙인건 사실 ^^
퇴계를 기리기 위해 도산서원앞 낙동강 백사장에서 임금이 직접 과거을 치렀다는 시사단(試士壇)이 있다.
그때는 송림이 울창하였는데, 안동땜 수몰때 송림은 사라지고,지금은 단을 만들어 높혀 놓았다
당시 응시자가 7,000 여 명 이었고,답안 제출자가 3,632 여 명 이었으며,
그중에 7 명 만이 뽑혓다 하니 1,000 대 1의 경쟁이라 지금의 공무원 응시율과 비슷하니
그놈의 입신(立身)이 그길 뿐인가??
문화해설을 해 주시는 여자 해설사와 염의장과의 실력대결도 들을만 했고, 퇴계선생의 사상도 조금은 알듯 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현판글씨를 선조가 내려주시고 한석봉이 ?다 하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지금 뭐 중요한것이 아닐것 같고,
지금은 퇴조해 가는 유교사상이 어떻게 받아 드릴지 두고 봐야 할일.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관심을 갖는이가 많다지 아마....
태풍이 걷어 낸 하늘은 그 푸르름이 청량하기 그지 없는 오후(17:00)
안동을 떠나 귀가길을 향한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청량하기 이를때 없고나 ^^
<솔 나리>
시사단
300 년된 왕버들
태풍이 걷어낸 맑은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