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치기 창작방

물의 이력서

김성조 2025. 1. 20. 17:57

나는 물입니다

태초에 한낱 습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주의 기를 긁고 긁어모아 겨우 한 방울이 되었으며

원래 투명하게 태어났어요

속이 다 보이도록 가릴 것도 없이요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본 것이 있고

들은 것이 있고

좋은 것들이 보이면서

욕심이 슬슬 자랐습니다

 

욕심이 생기면서

감출 것이 생겼습니다

구정물을 덮어쓰고

썩은 낙엽으로 감싸

완전히 감추어지면서

검은 물이 되어 갔습니다

냄새가 난다고 이웃이 멀어져 갔습니다

나만 몰랐습니다

좋은 물과 가까이하면서 알았지요

내가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왕따를 당하면서 따로 놀다가

큰 낭떠러지에 떨어졌습니다

이리저리 채이면서

깊이 자맥질을 한 후

회오리 속에 감기기도 했어요

잠시 혼절한 후 깨어보니

나의 꺼풀이 벗겨졌습니다

 

속이 다 들여다 보였어요

부끄러웠습니다

필사적으로 몸을 흔들어 개워냈습니다

한결 가벼웠습니다

주위에 다른 물들이 가까이 왔습니다

 

이리 개운할 수가 없군요

수초가 스치고

물고기가 들이받아도 괜찮습니다

다 받아 줍니다

 

나는 진짜 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