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대나무 숲에 가려진 고급문화 담양(2004.05.30)

김성조 2006. 8. 23. 21:50

대나무 숲에 가려진 고급문화 담양

2004. 05. 30 (제8신)

지난번(5/16) 거창 비계산 산행은 빼먹고

오늘은 산학회에서 년중 기획으로 실시하는 탐방소풍을 감

우천불문의 킬리 전통을 아는지 출발이후 일단 비는 멈추어 주었다

오늘의 테마는 정자 문화권 탐방인데

이게 보통 재미없는 놀이가 아니다

우선 눈에 뵈는게 별로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 염교사 그야말로 살판났다 하고 해설을 곁들인 설명에 동행하신 교수님들로 박수를 치신다

 

정자 유적지는 입장료 받을만치 꾸미지도, 크지도 않고 관리자도 없다. 그래서 모두 공짜다

일년 열두달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다는 거제 외도처럼 나무를 가져다 심거나 키를 자르거나 하지 않고, 계곡 정당히 정자를 우두커니(?) 지어놓고 마당에 소나무는 제 멋데로 자랐으며, 계곡물은 지가 흐르고 싶은데로 흘러가도록 두었다,

그나마 유흥준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덕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그런데,

정자 마루에 턱 걸치고 앉아

철철 그리며 떨어지는 물소리와 함께 소스락 그리는 나뭇닢이 부디치는 소리를 들어보면 먹을거리 걱정없던 양반들 이라면 무릎을 탁 치면서 청사안~리…” 하고 시조가 나올만도 하겠다 싶다

무등산을 옆을 끼고 이어지는 원효계곡에는 이러한 정자들이 80여 곳이나 있었다 한다

양반자식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학문을 닦기도 했고, 귀양살이 하면서 풀릴날을 기다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써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도 했겠지

양반들은 모두 땅이 있었으니 놀아도 수입이 생겼으니까

 

먼저 들린곳이 소쇄원,

마침 정자에는 소사모(소쇄원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 차를 나누면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일행중 누군가 아 우리회사에도 소주 좋아하는 사람들 모임이 있죠 하여 처음엔 어리둥절 하다가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소쇄원(灑園)을 풀이하면 뭐 선비들이 그닐며 놀던곳 이라는 말인데 웬 한자는 그렇게

복잡한걸 끌어다 썼는지 모르겠다.

안내판에 보면 소쇄원은 소쇄 양산보가 귀양가는 스승 조광조를 따라 낙향하였다가 스승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거기에 충격을 받고 고향 담양에 조성한 것으로 4백70여 년이란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별서(別墅)이다.

 

 

조광조가 나오고 하여 그래도 머리가 끄덕여 지더라. 조광조는 내가 좋아하는 인물중 한사람 이기도 하다. 그시대에도 개혁, 지금도 개혁, 하건만

개혁은 또다른 기득권의 쟁취인가?  왜그리 말이 많은지..

 

나 같은 보통사람들 에게는 그저 시원한 그늘이 좋아 보일 뿐인데

말짖기 좋아하는 양반들은 구석구석 찾아내어 붙인말이 소새원 48영이라 하여 즐겼다나

아래는 48영을 노래한중 일부분이다

 

담양 정자 문화엔 많은 역사적 인물이 나오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송강 정철이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국문시조(훈민가)도 많다

그 왜 있잖아

어버이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기르시고……..

이고진 저 늙은이 짐벗어 나를 주오…” 등등

이시대에는 웬 학자들이 그렇게 많이 나왔는지

율곡 이이 가 동갑이고, 의병장 고경명 등도 동문수학 하였다 한다

서울 출생인데 이곳 전라도에서 자라고 공부 하여 많은 친구를 두었는데 정치를(서인:西人) 하면서

정여립 모반 사건때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한 도구로 삼아 깡그리 청소하여 또다른 면이 이었다고 한다.

정철에 대해서 좀더 상세히 알아보려면 첨부한 부록을 보시길

 

 

소쇄원 바로 옆에 식영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이뒷산이 별뫼산이라 한자로 성산(星山)이겠다

그래서 성산별곡 이란 명작들이 나오고

인터넷에서 찾아 보면

(<성산별곡>은 조선조 사대부들의 전형적인 삶의 한 단면을 보여 준 작품이다.
작품에 관련된 인물들의 생애와 견주어서 좀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16세기 조선조 사대부들의 삶의 한 방식을 드러내 준 작품이라 하겠다. 조선조의 사대부들은 사유의 토지를 생활 근거로 하여 나아가 조정의 관료로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였고, 물러나면 수신제가(修身齊家)에 더욱 힘쓰면서 강호의 처사로서 자연을 벗삼아 여유로운 삶을 누렸다. 바로 이러한 사대부들의 생활의 양면성이 그들로 하여금 관료적 문학과 처사적 문학의 세계를 넘나들게 하였다. 이렇게 토지에 기반을 둔 생활 근거가 확고하게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이현보나 송순, 윤선도 등과 같은 여유만만한 강호 생활이 가능했으며, 관료나 처사의 위치에 관계 없이 이른바 귀거래(歸去來)의 강호 생활을 높이 평가하는 관념적 풍조 또한 보편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등등)

 

솔직히 우리같은 서민의 느낌으로는 좀 무식한 표현이지만 저희들끼리 잘먹고 잘놀고 있다는 것

 

송강의 호가 솔 송자(松)에 강(江)자 인데 송강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위엔 새로운 길과 다리가 어지러이 건설되어 과연 옛날의 여기는 얼마나 절경 이었을지 궁금하다

다만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 만이 송강의 멋을

나타내는 것 같다.

출발전에 “담양 하면 떠오르는 것” 하고 염교사 질문을 하니 누가 먼저 “대나무” 한다

그렇다 나도 담양 하면 추월산 좋고, 대나무가 많고, 그리고 순창가는 국도변 가로수가 유명하고 그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가사문학의 산실이 담양 일줄은 책으로만 조금 알고 있었지만 정철이 담양에 연관되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면 왜 정철은 담양에서 대접을 못 받을까?

큰 벼슬을 하지 못하고 평생을 유배지에서 보낸 다산 정약용 이나, 완당 김정희 같은 분은 국민 모두가 추앙을 하고 그분의 작품은 국보급으로 취급 되는데

그것은 아마도 정철은 정치 지향적인 면이 많았기 때문일 것 같다

정치를 지향하면 정적이 많고, 또한 많은 원성을 사게 되는 것이다

그기다 국민을 위한 몸을 낮추어 실행하는 면이 없었다면 말이다

아무리 좋은 국문시조를 지었기로 “나는 양반이니 너희들이 하여라” 는 식이라면 말이다

 

담양에는 10경이 있는데

(1.가마골 용소  2.추월산  3.금성산성  4.병풍산  5.삼인산  6.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  7.대나무골 테마공원  8.용흥사 계곡  9.관방제림 10.일동 삼승지)

 

그러나 가사문학과 관련된 곳은 한곳도 없다

소쇄원,식영정,면앙정,환벽당,송강정,취가정,풍암정 등 적어도 먹물먹은 식자라면 아낀다는 문화재 인데

역시 담양은 대나무가 너무 많아 가려지어 찾아가서 느끼지 않으면 모르는 곳이 많다.

그쪽 이야기는 끝이 없으니 그만하고,

 

대나무가 유명하다니 대나무를 보지 않을수 없지

 

대나무 종류가 몇인고 하니 무려 48종이 소개되고있다.

물론 외국산은 빼고

 

<나모도 아닌거시 풀도 아닌거시 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다음으로 들린 곳이 관방제림(官防堤林), 관에서 만든 방수림이란 뜻이겠지

제방에는 200여년 이상 된 팽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개서어나무, 곰의말채나무, 엄나무 등이 2㎞에 걸쳐 거대한 풍치림을 이루고 있는데, 그 풍치의 아름다움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하고 있다

 

<둘레가 성인 5명이 잡을 만치 큰 고목과, 나무 하나마다 일련번호를 붙혀 관리하고 있다>

 

관방제 에서 점심을 먹고 오늘의 하일라이트인 삼행시 발표회를 가졋다

시제는 담양과 연관있는“대나무”로 담양 도착후 발표 되었다

심사는 소설가 이시고 연극인 이신 설재록 선생을 극적으로 현지에서 모셔 공정성(?)을 기한다

선생은 이곳 담양 출신이고 대학생때 신춘문예에 당선된 소설가 이시고 전남일보 주필을 하신다

영예의 대상엔 여성회원에게로 돌아갔다.

 

:대잎향기 소소히 불어오고

:나홀로 송강정에 앉아 솔잎향 뒤로하니

: 무심히 그님그리워 가슴 쓸어안네

담양을 적절히 나타냈고 시적인 면에 높은 점수를 준 것 같다

 

운동경기는 남녀 혼합축구인데, 여자는 핸드링반칙이 없이 잡고 뛰어도 무방한 럭비식 축구를

하여 더욱 재미가 있는 것 같았다.

공장 체육대회에서도 한번 채용 해볼만한 룰이다

나는 상대방 골문 앞에서 오프사이드 무시하고 기다리다 줏어 넣은골이 세골, 해트트릭^_^

 

6킬로 미터의 제방과, 2킬로 미터 정도의 메타스콰이어 가로수 숲을 걸음으로서 오늘의

일정을 마침

가로수 사진은 작년에 본인이 찍은 것임

지금 국도 확장 공사를 하면서도 가로수 보호를 위해 옛길을 그대로 살려 두었다

 

.부록

1.송강 정철에 대하여

 

송강 정철(松江 鄭澈 : 1536~1593)은 조선 선조(14대) 때의 명신이면서 문인으로서 자는 계함, 호는 송강이며, 시호는 문청이다. 율곡 이이와 동갑나기인 정철은 돈녕부 판관을 지낸 정유침의 아들로서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당대의 명유들이었던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면앙정 송순 등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우리나라 시가사상 고산 윤선도와 쌍벽을 이루는 가사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52세 때 향리인 담양에서 지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조선 선조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유배가사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포 김만중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중국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에 비겨, 동방의 이소(離騷)라고 절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의 경치좋은 광주호 주변에 있는 식영정과 호남의 명산인 무등산 북서쪽의 원효계곡 자락에 있는 성산(별뫼)의 모습을 연결시켜 노래한 성산별곡은 정극인의 상춘곡,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가, 정해정의 석촌별곡으로 이어지는 호남 가단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고 있다. 송강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관동지방의 해금강, 내금강, 외금강 등의 절승지와 관동팔경(*)을 중심으로 한 기행가사인 관동별곡을 짓기도 했다. 또한 송강 정철은 본래 성질이 곧아서 바른 말을 잘하는 데다, 당시 조정의 당파 싸움에 연루되어 거의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쳤지만,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어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즐겨 회자되고 있다. 오늘날 송강의 시비(詩碑)가 강원도 원주시 치악예술관 입구에 있는데, 이는 송강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도민((道民)을 교화하기 위해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짓고 관동별곡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송강의 사후 담양 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과 경남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되었다.

2. 담양지방과의 인연

송강 정철이 전라남도 담양 지역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 였다. 두 누이가 각각 인종의 귀인이자,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던 탓으로 궁중에 자주 출입하며 경원대군(훗날 13대 명종)의 동무가 되기도 하는 등, 명문세가의 자식으로서 유복하게 지냈던 그의 어린 시절은, 송강이 10살(명종 즉위년, 1545년)이 되던 해에 을사사화가 터지면서 끝이 났다.
을사사화로 인해 계림군 유는 죽임을 당했고, 송강 정철의 형은 모진 매를 맞고 먼 곳으로 귀양가던 길에 죽었으며,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정철도 북으로 남으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떠돌았다. 6년 후 유배에서 풀린 그의 아버지는 한양 생활을 정리한 후, 온 가족을 이끌고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었던 전라남도 담양 땅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담양에서의 생활은 송강의 일생에서 그나마 안정적이고 따스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6살 되던 해까지 체계적인 학문을 배울 수 없었던 그는 사촌 김윤제에 의해 발탁되었는데, 그 후 10여 년 동안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면앙정 송순 등 호남사림의 여러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석천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다.
또한 담양 땅 무등산 자락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흠뻑 길렀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도 사귀었다. 송강 정철은 17세 때에 사촌 김윤제의 외손녀 사위(장인은 문화 유씨 강항)가 되었다.

3. 송강의 벼슬 생활

송강 정철은 명종 16년(1561년)에 27세로 과거에 급제하면서 율곡 이이와 함께 湖堂에 들어갔고, 서인의 거두로 불리면서 우의정까지 지냈다. 그러나 송강 정철의 벼슬살이는 선조 즉위 이후, 시대적 분위기와 더불어 파란만장했다.
수찬
·좌랑·종사관 등을 지내다가 40세 때에 당쟁에서 밀려 낙향하였다가, 43세 때에 다시 조정에 나가 직제학·
승지 등을 지냈다. 다시 동인의 탄핵으로 낙향하였다가 45세 때(1580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이 때 최초의 가사인 [관동별곡]과 [훈민가]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도승지·함경도 관찰사·예조판서로 승진하였으며, 49세 때에 대사헌이 되었다가 동인의 탄핵을 받아 또 다시 낙향하여 4년간 담양지방의 송강정에 은거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가사와 시조, 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에 정여립사건(1589년 기축년)이 일어나자 다시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 정개청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 세력을 추방하였으며, 다음 해에 좌의정이 되고, 56세에 세자 책봉 문제인 建儲問題(조선 선조 24년인 1591년에 왕세자 책봉문제로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기로 하였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에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던 선조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명천 땅에 유배되었다
57세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선조 임금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송하였으며,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에 경기도
·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명나라의 조선 출병에 감사하는 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4. 생애 마침

그 후 다시 동인의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 송정촌(松亭村)으로 물러나와 만년을 지내다가, 빈한과 회한속에서 이 해(선조26년,1593년) 12월 18일에 다사다난했던 생의 막을 내리니, 향년 58세였다.
송강의 묘소는 현재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에 있는데, 송강정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강의 신도비는 1684년에 문정공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오위도총부부관 김수증이 전서하고 글을 썼으며, 비의 높이가 2.5미터이고 폭이 1.5m이며, 신도비각은 15평으로서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다.

5. 송강의 성격

동서붕당으로 갈려, 서로 치고 받던 시절에 어느 편에도 서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입 밖에 내야 하고, 사람의 허물을 보면 親友權貴라도 조금도 용서함이 없어, 禍를 산같이 입더라도 앞장서서 싸우기를 불사하던 송강 정철의 성격상, 정치가로서의 그의 삶은 파란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6. 송강의 작품
송강의 작품으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와 장진주사, 시조 107수가 전하며, 유고로 송강가사, 송강집, 송강별추록유사(松江別追錄遺詞)가 있다.
송강은 평생을 시와 술을 즐겨했으며, 거문고에도 조예가 깊어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집 뜰에 있던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를 평생토록 애용했다고 하며, 술 좋아하는 송강에게 이 잔으로 하루에 한 잔씩만 마시라고 선조 임금이 준 은술잔을 송강이 사발만큼 두들겨 크게 늘려서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도 은잔과 함께 전해온다.

관동별곡(關東別曲) : 조선 선조 13년(1580년)인 송강 정철이 45세 때에 관동지방을 둘러보고 지은 295구의 기행 가사

* 가사 내용 :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질병이 되어, 은서지인 담양 창평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임금님께서) 8백리나 되는 강원도 관찰사의 직분을 맡겨 주시니, 아아, 임금님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그지없다.


* 관동팔경 : 관동팔경은 관동지방 즉 대관령 동쪽의 바닷가에 있는 여덟 군데의 명승지를 말하는데,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이 여기에 든다.

사미인곡(思美人曲) : 조선 선조 18년(1585년)인 송강 정철이 50세 때에 담양 창평에서 지은 서정가사

* 가사 내용 : 이 몸이 태어날 때에 임을 따라 태어나니, 한 평생 함께 살아갈 인연이며 이 또한 하늘이 어찌 모를 일이던가? 나는 오직 젊어 있고, 임은 오직 나를 사랑하시니, 이 마음과 사랑을 비교할 곳이 다시 없다.

속미인곡(續美人曲) : 조선 선조 18년-22년(1585-1589년)인 송강 정철이 50-54세 때에 지은 서정가사

* 가사 내용 : 서사- 임과 이별한 사연 :
갑녀- 저기 가는 저 부인, 본 듯도 하구나. 임금이 계시는 대궐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가 다 져서, 저문 날에 누구를 만나러 가시는고?
을녀-아, 네로구나. 내 사정 이야기를 들어 보오. 내 얼굴과 이 나의 태도는 임께서 사랑함직 한가마는 어쩐지 나를 보시고 너로구나 하고 특별히 여기시기에 나도 임을 믿어 딴 생각이 전혀 없어, 응석과 아양을 부리며 지나치게 굴었던지, 반기시는 낯빛이 옛날과 어찌 다르신고? 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려 보니, 조물주의 탓이로다.

성산별곡(星山別曲) : 조선 명종 15년(1560년)인 송강 정철이 25세 때에 지은 가사

전남 담양군 남면에 있는 성산(별뫼)의 풍경과 식영정(息影亭), 서하당(棲霞堂)을 중심으로 읊은 것으로 김성원(金成遠:號 棲霞堂)을 경모(敬慕)하여 지은 작품

* 가사 내용 : 엇던 디날손이 성산의 머믈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듯소.인생 세간(世間)의 됴흔 일 하건마난 엇디 한 강산을 가디록 나이너겨 적막 산중의 들고 아니 나시난고.

장진주사(將進酒辭) : 송강 정철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시조

* 시조의 내용 : 인생은 허무한 것이나 후회하지 말고 죽기 전에 술을 무진장 먹어 그 허무함을 잊어버리자는 일종의 권주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조는 전체적으로 암울한 분위기에 걸맞은 소재를 선택해서 삶의 허무함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어두운 어조로 잘 나타내고 있는데, 삶의 극단적인 허무의식에 빠지지 않고, 고사성어나 한문 조어를 피하였으며, 우리말의 일상적 생활어를 시어로 선택함으로써 일반 대중과의 공감대를 넓게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잔(盞) 먹새그려 또 한잔 먹새그려.
곶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새그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우러네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白楊)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굴근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쟈할고.
하믈며 무덤 우희 잔나비 휘파람 불제, 뉘우친달 엇더리.

* 출전 : <청구영언>
* 의의 : [순오지](홍만종의 시화)에 이백(李白), 이하(李賀), 두보(杜甫)의 명시인 <장진주>와 시상이 같다고 평함.

훈민가((訓民歌) : 송강 정철이 선조 13년(1580년)에 지은 연시조 16수

* 시조의 내용 : 송강 정철이 45때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강원도 지방 도민의 교화를 목적으로 지은 일종의 훈민가로서, 중국 송나라 때 진고령(陳古靈)이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조목별로 쓴 선거권유문(仙居勸誘文)인 13조목에 군신(君臣). 장유(長幼). 붕우(朋友)의 3조목을 추가하여 각각 한 수씩 읊은 것으로, 유교의 윤리를 주제로 한 교훈가이며,연시조의 형태를 취했으나 각 수는 완전히 독립된 작품이다.
1.
아버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사라실까.
하늘같은 가 업슨 은덕을 어데 다혀 갑사오리
2.
님금과 백성과 사이 하늘과 땅이로다.
내의 셜운 일을 다 아로려 하시거든
우린들 살 진 미나리 홈자 엇디 머그리.
3.
형아 아이야 네 살할 만져 보와
뉘손데 타나관데 양재조차 같아산다.
한 젖 먹고 길러 나이셔 닷 마음을 먹디 마라.
4.
어버이 사라진 제 셤길일란 다 하여라.
디나간 후면 애닯다 엇디 하리
평생에 곳텨 못할 일이 잇뿐인가 하노라.

5.
한 몸 둘헤 나누어 부부를 삼기실샤.
이신 제 함께 늙고 주그면 한데 간다.
어디셔 망녕의 것이 눈 눈 흘긔려 하난고.
6.
간나희 가는 길흘 사나희 에도다시,
사나희 녜는 길을 계집이 츠ㅣ도다시,
제 남진 제 계집 하니어든 일홈 뭇디 마오려.
7.
네 아들 효경 읽더니 어도록 배왔나니,
내 아들 소학은 모르면 마칠로다.
어네 제 이 두 글 배화 어딜거든 보려뇨.
8.
마을 사람들아 올흔 일 하쟈스라.
사람이 되여 나셔 올치 옷 못하면
마소를 갓곳갈 씌워 밥 먹이나 다르랴.
9.
팔목 쥐시거든 두 손으로 바티리라.
나갈 데 계시거든 막대 들고 좇으리라.
향음주(鄕飮酒) 다 파한 후에 뫼셔 가려 하노라.
10.
남으로 삼긴 듕의 벗갓티 유신(有信)하야.
내의 왼 일을 다 닐오려 하노매라.
이 몸이 벗님 곳 아니면 사람되미 쉬울가.
11.
어여 뎌 족하야 밥 업시 엇디할고.
어와 뎌 아자바 옷 업시 엇디할고.
머흔 일 다 닐러사라 돌보고져 하노라.
12.
네 집 상 사달흔 어도록 찰호산다.
네 딸 서방은 언제나 마치나산다.
내게도 업다커니와 돌보고져 하노라.
13.
오늘도 다 새거나 호미메고 가쟈스라.
내 논 다 메여든 네 논 졈 메어 주마.
올 길헤 뽕 따다가 누에 먹켜 보쟈스라.
14.
비록 못 니버도 남의 옷을 앗디 마라.
비록 못 먹어도 남의 밥을 비디 마라.
한적 곳 때 시른 후면 고텨 씻기 어려우리.
15.
쌍육(雙六) 장기(將碁) 하지 마라 송사(訟事) 글월 하지 마라.
집 배야 무슴 하며 남의 원수 될 줄 엇지,
나라히 법을 세오샤 죄 잇난 줄 모로난다.
16.
이고 진 뎌 늘그니 짐 프러 나를 주오.
나는 졈엇거니 돌히라 무거울까.
늘거도 셜웨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송강가사(松江歌辭) : 송강 정철의 가사(歌辭)와 시조 작품을 모아 엮은 가집(歌集).

목판본 1책으로 여러 이본(異本)이 있으나 그 중에서 이선본(李選本)
·성주본(星州本) ·관서본(關西本)의 세 판본이 전하고, 의주본(義州本)과 관북본(關北本)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 밖에 필사본이 가끔 발견되나, 완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 못하다.
이선본은 원래 소장자였던 일사(一加) 방종현(方鍾鉉)이 명명(命名)한 것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의 일사문고(一加文庫)에 들어 있고, 1948년 7월에 발견된 관서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