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의 산실 필경사(筆耕舍)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초가로 지붕을 한 교실에서 한복을 입은 젊은 여선생을 향해 땟국이 흐르는 더벅머리 아이들이 일제히 따라 한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부모의 반대로 교실에 못 들어간 아이들이 담장 밖에서 따라 읊는다
“아는 것이 힘….
최은희 신영균 주연의 영화 상록수
1961년 흑백시대에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로 대종상 남녀 주연상을 받은 영화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이 영화를 처음 보면서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의 주제가 소설 상록수 임은 그 후 책을 읽으며 알게 되고..
일제시대에 젊은 청년들이 농촌에 내려가 농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을 하는 내용임은 다 아는 내용이며 실존인물 채용신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후 컬러시대에 임권택 감독이
1978년 한혜숙 김희라 주연으로 다시 만든다
그 원작 상록수의 산실이
내가 일하고 있는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 있다
철강산업이 한창 일고있는 당진 공업단지의 산업도로 38호 국도로 가다보면 필경사의 안내판이 나오는데 막상 들어가면 차 한대 겨우 들어가는 시골길 이다
그러나 필경사 마당엔 너른 주차장이 있다
<심훈 문학기념관>
필경사는
심훈(沈薰 1901~1936)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부모가 살고 있던 부곡리에 내려와 〈영원의 미소〉〈직녀성〉등 소설을 쓰고 있던 1934년, 자신이 직접 설계하여 아담한 초가로 지은 것이다.
심훈이 터를 물색하던 중, 아끼던 상아 파이프(빨부리)를 잃어버렸다가 찾은 곳이 지금의 필경사 터인데,
다시 찾은 상아 빨부리에 담배를 피워 물고 사색하면서 필경사 터를 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서재에는 지금도 잉크 자국이 남아 있는 책상과 문갑, 2층장, 멈추어 있는 벽시계, 완당(玩堂)의 글씨
‘硏經凄日罷吟詩’, 그리고 고인의 유품일 성부른 옷가지 몇 점이 걸려 있는 횃대 등이 있으며.
마루에는 삼층장, 뒤주, 호롱 등이 놓여 있고, 안방에는 문갑 하나가 덜렁 자리잡고 있다" 고
소개 되어 있으나 오늘 나는 혼자서 인지 필경사 안은 들여다 보지 못하고 기념관만 둘러 봤다
<상록수 향나무가 추사의 세한도 처럼 푸르게 서있다>
심훈이 필경사를 짓고 가족과 함께 살면서 우리 나라 계몽소설의 대표작 〈常綠樹〉를 집필하여 동아일보 현상 공모에 당선이 되었고,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을 이 집에서 낳았다.
이 집은 1936년 타계할 때까지 짧은 동안이나마 그의 생애에서 가장 안정된 생활을 했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筆耕舍란 글자 뜻은 단순히 생각하면 글쓰는 일을 땅을 경작하는 것에 비유한 이름 정도로 알기 쉽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다.
심훈의 〈필경사 잡기〉에 의하면, ‘筆耕’이란 시의 제목을 따서 택호(宅號)를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시는 그의 시집 〈그날이 오면〉에 실어 펴내려다가 일제의 검열에 전문이 삭제되었던 것으로,
이른바 일제가 말하는 불온 작품이었다.
심훈이 신문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문학 작품 집필에 전념하던 때 지은 집에 ‘필경’이란 택호를 붙였던 것은 그의 문필의 방향이 항일적인 데로 전향했음을 말해준다.
시‘필경’은 일제의 폭정에 굽힘이 없이 진실을 파헤치자는, 당시 신문기자들에 대한 호소였던 것이란다.
시집 〈그날이 오면〉을 발간하려다가 일제의 치안 방해란 이유로 많은 부분이 삭제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동방의 애인〉〈불사조〉등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다가 일제의 검열에 걸려 중단되는 등, 일련의 사건들을 미루어 볼 때, 택호를 굳이 ‘필경’이라 붙인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고.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아.
이 목숨이 끊지기 전에 와주기만 할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鐘路의 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頭蓋骨은 깨어져 散散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둘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1930. 3. 1)
심훈은 "그날"을 맞이 하지도 못하고 병으로(장티푸스) 35세에 요절을 하여 더욱 안타갑다
심훈의 연보
1901년. 9월. 12일(음) 경기도 인천부 과천군 북면 노량진(현 동작구 노량진동)에서 출생. 본관 청송. 본명 대섭(大燮). 아버지 심상섭과 어머니 해평 윤씨의 3남 1녀 중 막내.
1912년 노량진에서 흑석리 176번지로 이주(현재의 동작구 흑석동)
1915년 서울보통학교를 나와 같은 해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17년 3월 이건용(전주 이씨)의 막내 딸 해영과 결혼.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시에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3월 5일 헌병대에 잡혀 투옥. 같은 해 7월 집행유예로 출옥.
1920년 일본 유학을 하려다 집안의 반대로 뜻을 꺾고 중국으로 건너감.
1921년 중국 항주시의 지강대학교 문과에 입학.
1922년 11월 지강대학을 중퇴하고 귀국.
1924년 아내 이해영과 합의 이혼.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
1925년 이경손이 각색 감독하던 영화〈장한몽〉의 주연배우가 행방불명되어 후반부의 이수일 역을 대행.
1926년 ‘철필구락부사건’ 발발로 동아일보 사직.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소설인〈탈출〉을 동아일보에 연재.
1927년 2월 일본 경도의 일활촬영소에 들어가 무라다 감독의 지도로 영화 공부를 하고, 같은 해 8월에 귀국하여 계림영화사 제작〈먼동이 틀 때〉의 시나리오를 작성 감독하여 10월 26일 단성사에서 개봉.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
1930년 장편소설〈동방의 애인〉을 조선일보에 연재했으나 일경의 검열에 걸려 중단. 이어 같은 신문에〈불사조〉를 연재했으나 역시 게재 정지 처분을 받아 미완인 채 남게 됨. 시〈그날이 오면〉발표. 12월 24일 안정옥과 재혼.
1931년 조선일보사 사직.
1932년 양친이 있는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가 창작 생활에 정진. 시집〈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에 걸려 좌절. 장남 재건 출생.
1933년 2월 조선중앙일보에〈영원의 미소〉연재.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발탁. 이 신문사에서 발간한 잡지〈중앙〉창간호 편집에 참여.
1934년 1월 신문사 사직. 2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직녀성〉연재.〈직녀성〉고료로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 자신이 설계하여 자택을 짓고 '필경사(筆耕舍)'라 택호를 지음. 같은 해 7월 차남 재광 출생.
1935년 1월〈영원의 미소〉를 한성도서에서 단행본으로 발간. 장편〈상록수〉로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공모에 당선. 동 신문에 연재. 그 상금으로 당진에 상록학원을 설립.
1936년 4월 3남 재호 출생.〈상록수〉영화화를 계획하여 각색하고 제작은 고려영화사에 맡겼으나 일제의 방해로 좌절. 잡지〈사해공론〉에 펄벅의〈대지를 번역 연재.〈상록수〉출판 관계로 서울 한성도서주식회사 2층에서 기거 하다가 병(장티푸스)을 얻어 9월 16일 오전 8시 타계. 유족으로 미망인과 세 아들이 있음.
일제의 검열에 걸려 발표를 못한 시 "그날이 오면 "
묘비 여기에 묵념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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