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모임과 함께 가고싶어 했던 백두산과 태산도 못가면서 갑자기 서안(西安=중국발음 시안)에 있는 화산(華山)에 가게 된 사연은 우선 날자가 내가 갈수있는 날로 잡았기 때문이다 ^^
마누라와 여동생이 경인(庚寅 1950년) 생으로 어느듯 올해가 회갑이다
두 주인공과 동생친구 나같은 들러리 그리고 친구들과 16명이 한팀이다
아들 딸들이 여행가라고 주선해 주어 우리가 선택한 곳이 오악(五嶽)중 서악이라 불리우는 화산(華山·2,160m)을 선택 하였는데
막상 서안엘 가보니 세상에나 볼것이 천지배까리로 있는 것이라
그도 그럴것이 서안은 아테네, 로마 그리고,이스탄불과 함께 “세계 4대의 고도(古都)”이고.
옛중국 13개의 왕조가 1,400여 년 이곳을 수도로 삼았던 곳으로 찬란하고 유구한 중국고대문명의 보고로 ‘천연적인 역사박물관’이다 할만 한 곳이니..
그러나 짧은 여정에 다 돌아볼 수는 없고 대표적인 것만 뽑은 중에 특히 소개하고픈 곳을 고르자면
날자순서대로 먼저 비림(碑林)이다
비림은 글자 그대로 비석의 숲이란 뜻인데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서예 라는것이 중국에서 건너 왔는줄 안다
그 교본이 이비석들을 탁본한 것인데 여기서 그 원본을 본다는 것은 정말 가슴 벅찬 일이렸다
젊은 가이드가 설명을 잘 하긴하나 귀에 남는것이 없어 우리 염선생이 계셨다면 정말 잘 하셨을 거란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자료를 참고 했으니 양해를 하시고
사진은 제가 찍은 것이니 실감있게 감상 하실것 ㅎ
위의 사진을 보면 비림의 비(碑)자에 점이 하나 없는데
이글은 청나라 장군 임칙서의 글인데 아편전쟁을 하러 왔던 임칙서가 나머지 획은 전쟁을 이기면 쓰겠다고 했는데 결국 전쟁에서 지고 그도 죽는다
결국 임은 자신의 비문을 남긴 결과가 되었다
비림 박물관
비림박물관은 서안시 남쪽 성벽 괴성루(魁星樓) 아래에 있으며 비석이 숲을 이루고 있어 비림이라고 한다.
중국 전통적인 공묘(孔廟)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중국 고대비석을 제일 일찍 보존하고 명비(名碑)가 제일 많은 예술 보물고 이다.
비림은 북송 원우 2년(1087)에 당나라 비석들을 옮겨오면서 형성되었다. 이미 920년 정도의 역사가 된다.
당대 경전을 옮겨 쓰는데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당 문종은 개성 2년(837) 국자감 좨주 정담(鄭覃) 등이 경전을 감정하고 開成石經을 새겼다.
이때의 석각과 당 현종이 친히 써서 새긴 石台孝經은 원래 장안성 무본방(務本坊: 지금 남문 밖 섬서성 체육관 일대)의 국자감 태학내에 있었다.
당대 말기 주온(朱溫)이 당 소종을 데리고 낙양으로 천도하고 장안을 주둔하고 있던 우국군절도사 한건(韓建)이 장안성을 황성지역으로 축소하여 진귀한 비석이 성 밖 노천 황무지에 방치되었다.
수많은 사람의 건의가 있어서 한건과 후의 유심(劉鄩: 후량 시기 장안 지방장관)이 이들 비석을 성내 당대의 尙書省 소재지, 지금의 西大街 광장일대로 옮겨 놓았다. 이곳은 지세가 낮고 습기가 많아 비석이 쉽게 몰락되고 파손되자, 북송 조운대사 여대충(呂大忠)의 조직하고 또한 1087년에 지금의 이곳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비림에서 처음 만나는 이 비석은 당현종이 쓴 석대효경(石台孝經)인데
현종이 왕비 무혜비를 잃고 시름에 빠지다가 여덟번째 아들 수왕의 처 즉 며느리 양귀비를 탐을 냈으나 차마 며느리를 취하지 못하니 내시가 꾀를 내어 이 비를 짓게하고 3일동안 자식들에 효경을 가르치니 아들이 눈물로 뉘우치고 양귀비를 바쳤다는 후문
비림 박물관에는 한나라 때부터 근대의 각종 비석, 묘지명 2,300여개가 있는데 그 중에 1,807개의 비석을 7개의 진열실과 8개의 비정(碑亭)과 6개의 비랑(碑廊)에 전시하고 있다.
석각예술실에는 100여 건의 한(漢)대부터 당(唐)대의 릉에서 출토된 석각예술과 종교 석각예술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총 면적은 31,900평방미터이며 진열실 면적은 3,000평방미터이다.
종이가 나오기 전에 사람들은 나무나 대나무에 글씨를 새겼는데 오래 보존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차츰 돌에 새기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비석문화는 시작되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석비를 통해 그 유명한 왕희지 서체를 직접 볼 수 있고 안진경, 유양경 등의 필법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詩)에서 사람들은 이백의 뛰어난 천재성을 칭송하여 시선(詩仙)이라 하듯이 그림에서는 오도자를 높여 화성(畵聖)이라 한다.
그리고 초서(草書)의 대가(大家) 장욱을 초성(草聖)으로 일컬으며 서예에서는 왕희지를 서성(書聖)이라한다.
이 비석은 "관제시죽(關帝詩竹)" 이라 한다
관우가 지은 대나무 시라고 하는데, 제(帝)는 임금이니 관우는 비록 장수몸으로 죽었지만 사후 그를 왕으로 칭송한다
여기 비림을 관리하는 와룡사의 사천왕 가운데 관우상이 있었고 화산에도 관우를 모시는 절이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불사동군의(不謝東君意) 단청독립명(丹靑獨立名)
막혐고엽담(莫嫌孤葉淡) 종구불조령(終久不凋零)
“조조의 호의에 감사하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관우는 몸이 비록 조조의 숙영지에 있지만 마음은 대나무처럼 영원히 변치 않고 유비와 장비와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조가 관우를 죽이지 못하고 보내 줬다는..(사실은 도망 쳤지만..)
이비석을 탁본하여 팔고 있었음
이글씨는 어디서 많이 본 글씨 일것이다
여기 그 원본이 있다
탁본을 많이 뜨서 반들 반들 하다 ^^
탁본을 찍고 있다
진열장에 비친 얼굴이 낮익은 얼굴인데?
뭘 좀 알고 보는것인지 진지하군 ...ㅋ
이것이 서예교본인 탁본 철
한국에 들어 온 것은 모두 사본 이겠지..
한쪽 전시실에는 동양화와 돌조각도 있다
많은 그림중에 하필 이그림을 찍었을꼬? ㅎ
반지라는 연못가에서
선비들이 과거시험보고 합격하면 이못에서 붓을 씻었다 한다
비림 앞 거리는 문물거리인데 즉 문방사우를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아래사진은 서안시를 둘러사고 있는 성곽이다
오늘의 주인공들과 노래방에서...
계속하여
화산, 진시황 병마용, 화청지와 장한가 등을 소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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