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哲身者南人(卽東人) 大家之裔 居京畿道楊根郡 素以經禮之學爲世名儒 聖敎到東 全家信從
권철신은 (암브로시오 1736∼1801) 남인 (곧 東人) 대가의 후손으로,
경기도 양근군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경학과 예학으로 세상에서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는데,
성교가 우리나라에 이르자 온 가족이 다 믿고 따랐습니다.
本係名家 謗亦甚 其弟日身 死於辛亥之窘 自此以後 不敢顯然守誠 而仇嫉者之憎恨愈深
본래가 이름 있는 집안인 만큼, 성교를 믿자 남들의 비난도 역시 심하였습니다.
그의 아우 일신이(프란치스코사베리오 ?∼1801) 신해박해(1791) 때에 죽자,
그 뒤부터는 감히 드러내놓고 신앙을 지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원수같이 여기고 시기하는 자들의 미움과 원망은 점점 더 심해 갔습니다.
己未夏本鄕怪鬼輩 誣告官 權家子弟 亦爲對卞 事將張大 賴本官明良 調停解釋 惡謨不遂
기미년(1799) 여름, 그의 고향의 귀신같이 고약한 무리들이
사실과 어긋나는 일을 꾸며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이에 권씨 집안의 자제들도 맞서 일이 장차 크게 벌어지게 되었는데,
그 고을 군수가 현명하게 조정하고 정당하게 해석한 덕택에,
간악한 모함은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詭計愈秘 締結京中惡官 庚申五月 面奏先王曰 楊根一鄕 邪學熾盛 無人不學 無村不爲
그러나 간교한 계획은 더욱 비밀히 진행되어, 서울에 있는 간악한 무리와 결탁하여 경신년(1800) 5월에 직접 선왕을 뵙고 아뢰기를 "양근 온 고을에 사학이 극성하여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고, 믿지 않는 마을이 없습니다.
而本官恬然 不加査察 該郡守合當警責 先王可其奏 楊根守引咎自退 新官到任 舊案復起 逮捕多人
그러나 군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조금도 사찰하지 아니하니,
마땅히 그 군수를 징계하고 문책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선왕은 그들의 말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양근 군수는 책망을 받고
스스로 사퇴하였습니다. 새 군수는 부임하자마자 묵은 사건을 다시 일으키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습니다.
而哲身則年老 怯 上京姑避 官將其子代囚之 其子屢請代受父罰 而本官不許 必欲招致哲身 事久不決
철신은 나이가 많고 체포 후의 일을 두려워하여 서울로 올라가
잠시 몸을 피하였습니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 아들이 여러 차례 아버지의 벌을 자기가 대신 받겠다고 청하였으나,
군수는 허락하지 않고 기어코 철신을 불러들이려고 하여, 사건이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아니하였습니다.
先王雖甚疑 然每事本不欲張大 且鐸德之事 關係兩國 萬一顯著 則處置極難 故乙卯後 群臣多請嚴禁聖敎 而一幷委之於有司 若不欲干涉者然
선왕이 성교에 대하여 비록 몹시 의심하고 두려워하기는 했지마는,
본래 무슨 일이든지 크게 확대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또한 신부의 [鐸德] 일은 (1795년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일)
두 나라 사이에 관련되는지라, 만의 하나라도 일이 드러나 알려지게 되면
그 처리가 매우 난감하므로, 을묘년(1795) 이래 여러 신하들이
성교를 엄중히 금할 것을 여러 번 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체를 담당 관리에게 맡기고는 그러려니 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外鄕窘難 莫非暗命 而佯若不知 盖欲緩敎友之心 潛捕神父 暗地結果 計未成 而遽 落
그러나 지방의 박해는 은밀한 명령에 의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일부러 모르는 체한 것은 교우들의 마음을 느슨하게 하여
신부를 잡아 암암리에 결말을 지어 버리려고 했던 것인데,
그 계획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金汝三者 本係湖中人 弟兄三人 皆領聖洗 爲避窘難 移居都下 近年汝三冷淡背敎 交結匪類 兩兄不能禁
김여삼이라는 (?∼? 1801년 신유박해의 밀고자) 사람은 본래 충청도 사람으로,
형제 셋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박해를 피하려고 서울로 이사하였는데
근년에 와서 여삼은 냉담하여 성교를 배반하고 무뢰배들과 함께 몰려다녀,
그의 두 형도 이를 막지 못하였습니다.
有李安正者 亦係湖中人居京者 有家産而 爲汝三之姻親 汝三貧寒 常望其週給 而安正不能稱其意
이안정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역시 충청도 사람으로 서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이 좀 있었고, 여삼과는 사돈간이었습니다. 여삼은 집이 가난하여
늘 보태주기를 원했습니다만, 이안정이 그의 뜻대로 다 들어주지는 못하였습니다.
因而結恨 尋常切齒 時安正恒受聖事 汝三 知之 妄以爲若神父勸他施財 則他不敢不從 而因神父不勸 故他不施財
이로 인해 여삼은 한을 품고 항상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이 때 안정이
늘 성사를 받고 있었는데, 여삼은 이를 눈치채고 망령된 생각을 하기를, ’
만약 신부가 다른 사람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라고 권하면
그는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가 안정에게 권하지 않았으므로 안정은 여삼에게 재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遷怒於神父 生謀害之心 遂將神父之事 密告於捕盜部將 部將輩廉察五六年 終不能得 及聞此言 如何不喜歡
그러자 여삼의 노여움은 신부에게로 옮겨져서 신부를 모략하고 해칠 마음을 먹고
끝내는 신부님의 일을 포도부장에게 밀고하였습니다.
포도부장의 무리들은 5∼6년 동안이나 몰래 살펴보아도 끝내 알아내지 못하던 판에 이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許以事成 則當薦汝爲厚祿之任 究問此人 方在何處 時神父住葛隆巴家 汝三亦能猜測 遂與部將約曰 某日 來我家 我當告之
그들은 "일이 성공하면 마땅히 너를 재물이 넉넉한 관직에 추천하겠다"고 하고,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캐어물었습니다.
이 때 신부는 골롬바의 (葛隆巴 姜完淑 1760∼1801 순교자)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여삼은 이것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포도부장과 약속하기를,
"아무날 당신이 우리 집으로 오면 내 알려 주겠소" 하였습니다.
約日未到 汝三適往他人家 忽然得疾不能還 約日部將到家空還 幸有一敎友 探知此事 告于神父 神父避往別所 命李安正備錢數十貫 往見和解之
그런데 약속한 날이 채 안되어 여삼이 마침 다른 사람의 집에 갔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약속한 날에 포도부장이 그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헛수고만 하고 돌아갔습니다.
다행히 한 교우가 이 일을 알고 신부에게 알려, 신부는 다른 곳으로 피했고,
이안정에게 돈 수십 관을 마련해 가지고 찾아가서 여삼과 화해하게 하였습니다.
汝三恨怒暫緩 不多日 國王棄世 各司多事 事得不起 然汝三旣有密告之後 亦不能自己 常與惡輩 綢繆謀議 必欲肆毒而後已
그리하여 여삼의 원한과 분노가 잠시 누그러졌고, 며칠이 못되어
국왕이 세상을 떠나니, 각 관청에서는 일이 많아 사건이 더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삼은 이미 밀고를 한 뒤여서 또한 자기 스스로는 그만둘 수도 없었으므로, 늘 못된 무리들과 함께
용의주도하게 서로 의논하여 기어코 해치려고만 하였습니다.
本國士大夫 二百年來 分黨各立 有南人 老論 少論 少北 四色之目 先王末年 南人又分而爲二 一邊則李家煥丁若鏞李承薰洪樂敏等若干人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은 2백년 전부터 당파가 생겨서 서로 대립하였습니다.
남인, 노론, 소론, 소북의 네 당파가 있었는데,
선왕의 말년에 남인이 다시 나뉘어 두 파가 (攻西派와 信西派) 되었습니다.
그 한편은 이가환 (1742∼1801 남인학자) 정약용 (요한 1762∼1836 실학자)
이승훈 (베드로 1756∼1801) 홍낙민 (루가 1740∼1801) 등 몇몇인데
皆從前信主 偸生背敎之人 外雖毒害聖敎 中心尙有死信 而同黨鮮少 勢甚孤危 一邊則洪義浩睦萬中等 眞心害敎之人 十年以來 兩邊結怨甚深
모두 전에는 주님을 믿었으나
구차하게 목숨을 아까워하여 성교를 배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성교를 해쳤지마는 마음속에는 아직도 신앙을 위해 죽을 생각이 있었는데,
그 당파의 사람은 수가 아주 적어서 세력이 몹시 외롭고 위태로웠습니다.
또 한편은 홍의호 (1758∼1826 박해자) 목만중 (1727∼? 천주교를 배척한 문신) 등 진심으로 성교를 해치는 사람들인데,
십 년이래 양편은 서로 깊이 원한을 맺었습니다.
老論又分而爲二 曰時派 皆承順上意 爲先王心腹之臣 曰僻派 皆力守黨論 抗拒上意 與時派如仇讐 而黨衆勢大 先王畏之 近年擧國而聽之
노론도 역시 두 파로 나뉘었는데
시파라는 것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여 심복의 신하가 되었고,
벽파라는 것은 당론을 고수하는데 힘써 임금의 뜻에 항거하므로
시파와는 원수처럼 되었으나, 당의 형세가 매우 커서 선왕도 이를 두려워하였고,
근년에는 온 나라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李家煥文章盖世 丁若鏞才機過人 乙卯以前 先王寵任之 乙卯後 漸見疎棄 然此二人爲僻派之所深忌 必欲中害
이가환은 문장이 세상에서 출중하였고, 정약용은 재주와 기지가 뛰어났으므로
을묘년(1795) 이전에는 (주문모 신부의 입국, 활동 사실이 발각되기 이전)
선왕이 그들을 총애하고 신임하였으나,
을묘년 이후로는 차차 소외당해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벽파가 몹시 꺼려하여 끝끝내 해치려고 하였습니다.
家煥等雖背敎害敎 僻派諸人 常指斥爲邪黨 駁備至 先王每掩護之 僻派不得肆害
이가환 등은 성교를 배반하고 성교를 해쳤는데도,
벽파의 여러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사당으로 지목하고 배척하여
온갖 참소와 공박을 다하였지마는,
선왕이 매번 그들을 감싸주었으므로, 벽파가 마음대로 해치지는 못하였습니다.
及先王薨 嗣君幼 大王大妃金氏 垂簾聽政 大王大妃 卽先王之繼祖母 本係僻派中人 本家曾爲先王所廢
그런데 선왕이 돌아가시자
대를 이은 임금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대왕대비는 곧 선왕의 계조모로서 본래 벽파 출신으로,
친정은 일찍이 선왕에게 폐가를 당하였습니다.
因此積年懷恨 而莫能泄 意外臨朝 遂挾僻派而肆毒 庚申十一月 先王葬禮 過 卽將一班時派 盡行放逐 朝內半空
그로 인하여 대왕대비는 여러 해 원한을 품고 있었지마는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가, 뜻밖에 정권을 잡게 되자,
마침내 벽파를 끼고 거리낌없이 학정을 폈습니다. 경신년(1800) 11월,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시파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내어, 조정 안을 절반 정도나 비게 하였습니다.
從前害敎之惡黨 素與僻派相連 見時勢大變 譁然 起 有大擧之勢 庚申四月 明會報名之後 諸友勸於神工 會外之人 亦從風而動 皆以化人爲務
전부터 성교를 해쳐오던 못된 무리들이 벽파와 서로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시세가 크게 변동되는 것을 보자 요란스럽게 들고일어나서,
크게 일을 저지를 형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경신년(1800) 4월에 명도회에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주문모 신부에 의해 세워진 평신도들의 교리연구 및
전교단체) 가입한 후로 여러 교우들이 신공에 부지런히 힘썼고,
회원 아닌 사람들도 역시 자진해 움직여 모두 남을 감화시키기에 힘썼으므로,
秋冬之間 蒸蒸向化 日甚一日 而婦女居其二 愚鹵賤人居其一 士夫男子 世禍 信從者狼少
그 해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무럭무럭 감화되어 나날이 불어났는데,
그 중 부녀자가 3분의 2요, 무식한 천민이 3분의 1이었습니다.
사대부 집 남자는 세상의 화를 두려워하여 믿고 따르는 사람이 극히 적었습니다.
乙卯窘難 葛隆巴有保護之大功 而才能出衆 故神父專任之 葛隆巴亦熱心料理 化人甚衆 仕宦家婦女 入敎者頗多
을묘년(1795) 박해 때 골롬바는, 신부를 보호한 큰 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능이 출중했기 때문에, 신부는 전적으로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고,
골롬바 역시 열성으로 일을 처리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벼슬아치 집안의 부녀자로서 입교하는 이가 아주 많았습니다.
盖國法若非逆賊 刑不及於士族婦女 因此他們不以禁令爲慮 神父亦欲籍此爲廣揚之根基 待之特厚 敎中大勢 都歸女友 然聲聞緣此亦廣
대개 우리나라의 법이, 역적만 아니면 사대부의 집안 부녀자에게까지는
형벌이 미치지 않으므로 이로 인해 그들은
금령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도 역시 그 점을 빌어서
성교를 널리 전할 바탕을 삼고자 하여 그들을 특별히 후하게 대접하시니,
교회 안의 대세가 모두 부녀 교우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하여 성교의 소문도 그에 따라 또한 널리 퍼졌습니다.
聖敎爲國家之一大政 新君卽位之後 明知必有一番處分 而不知處分之如何 神父愈加謹愼敎友咸懷憂
성교가 이 나라의 큰 정사가 되었으므로 새 임금이 (純祖) 즉위한 후
반드시 제일 먼저 어떤 처분이 있을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처분이 어떠한 것일지는 알 수가 없어서,
신부는 더욱더 삼가고 조심하였고,
교우들은 모두 속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十二月十七日 刑曹發差 捕崔多黙拘因 而此人則去年獄案 尙在未決 此番被捕 不是意外 且其時不過自此申禁 朝廷則未有嚴敎
12월 17일에 형조에서는 포졸을 내보내어 최필공 토마스를 체포해다가 가두었는데, 이 사람은 지난해의 송사가 아직 미결로 있었으므로,
이번에 그가 체포당한 것은 뜻밖의 일은 아니고,
또한 그 때는 단속하여 금하기로 되어 있었을 뿐으로 조정에서는 아직
엄중한 금령이 없었습니다.
故敎友們 雖爲戒嚴 不甚驚 十九日聖獻堂占禮日曉頭 崔多黙之從弟崔伯多祿 在臨街藥 閣子裡 與數人念公經
그러므로 교우들은
비록 경계는 하였지마는 그다지 놀라거나 두려움이 심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19일 성헌당첨례일 (주의 봉헌 축일)
새벽에 최토마스의 종제 최베드로가 (崔必悌 伯多祿 1769∼1801 순교자)
한길 가에 있는 약방 안쪽 방에서 몇몇 교우들과 함께 경문을 외고 있었습니다.
窓外適有投錢禁亂一輩 (投錢雜技名無賴輩以此賭錢故法司常有禁令) 聞窓裡 心聲 以爲投錢拍節聲 排窓躍入 不見投錢 搜各人身邊 獲一占禮單
창문 밖에 마침 투전을 단속하고 다니는 한 관리가 있다가,
창문 안에서 가슴 치는 소리를 듣고 투전의 장단 치는 소리로 알고
창문을 열고 뛰어들었는데 투전이 보이지 않자 한 사람 한 사람 몸을 수색해서
첨례단 (교회 축일표) 한 장을 찾아냈습니다.
而伊等不識字 不知爲何物 遂持去以示識字之吏 知係聖敎文字 復回來捉人 時天已大明 他敎友已盡走散 惟伯多祿 及吳斯德望兩人 被捕入官 與多黙同囚
그들은 글자를 알지 못해서 무엇인지 모르므로,
글을 아는 관리에게로 가지고 가서 보였습니다. 그것이 성교에 있는 글임을 안
그들은 교우들을 잡으려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때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았는데, 다른 교우들은 벌써 다 달아나 흩어졌고,
오직 베드로와 오스테파노 두 사람만 남아 있다가 잡혀서 관가로 들어가
토마스와 같이 수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