於是捕盜部將輩 挾金汝三及都下無賴輩 以爲耳目 到處 採訪 敎中洶洶擾亂 値歲暮 事得暫緩
이에 포도부장의 무리들은 김여삼과 장안의 무뢰한들을 앞장 세워서,
안 가는데 없이 돌아다니며 눈을 부릅뜨고 찾아 교중이 온통 물 끓듯 요란해졌는데, 마침 세밑이 되어 일이 잠시 잠잠해졌었습니다.
正月初九日 總會長崔若望被捕 自後部將輩 晝夜旁午 處處緝拿 被捕者塡滿兩廳 (捕盜廳有左右兩廳) 而率皆愚鹵新進 及閭巷婦女 剛毅者狼少
정월 초아흐레 (1801. 1.9) 총회장 최창현 요한이 (崔昌顯 1754∼1801 순교자)
체포 당하고부터 부장들은 밤낮 없이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여기 저기서 잡아가,
체포된 사람이 양청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무식하고 새로 입교한 사람과 여염집 부녀자들이었고,
의지가 강하고 굳센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十一日 大王大妃下敎嚴禁 曰 先王每謂正學明 則邪學自熄 今聞邪學依舊 自京至于畿湖 日漸熾盛 豈不凜然寒心乎
11일 대왕대비가 교서를 내려 성교를 엄금하였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였습니다. ’선왕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바른 학문이 밝혀지면 사학은 저절로 꺼져 버릴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제 들으니 사학이 여전하여 서울에서 기호에 이르기까지
날로 점점 더 성해진다고 하니, 어찌 소름끼치고 한심한 일이 아니랴.
京中及外鄕 修明五家統之法 統內若有爲之者 統首告官懲治 然猶不悛 當論以逆律 殄滅之 無遺種 於是各處騷擾 禍炎愈熾 敎友們 尤無所措手足
서울과 지방에 오가작통의 법을 분명히 하여,
그 통 안에 만약 사교를 믿는 자가 있으면 통장이 관가에 고발하여
정치하게 하여라. 그래도 오히려 뉘우치지 않으면 마땅히 역률로 논죄하여
모두 다 사형에 처하고 씨도 남기지 않게 할 것이다.’
이에 각처가 소란해지고 환난의 불길이 더욱 맹렬해져서,
교우들은 몸둘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明會長鄭奧斯定 若鏞之第三兄也 先居楊根 庚申五月之窘 率家上京 本來 謗甚盛 庚申夏 有一惡官 指名請誅於先王面前 賴先王叱止之
명도회장 정아우구스티노는 (정약종 1758∼1801 순교자) 정약용의 셋째형입니다.
전에는 양근에서 살다가 경신년(1800) 5월 박해 때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전부터 사교를 믿는다는 비난을 많이 받아 왔는데,
경신년 여름 한 고약한 관리가 선왕의 면전에서
그를 지명하여 주살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왕이 꾸짖어 이를 모면하였습니다.
至是見時勢已變 火色漸熾 自己恐不得免 取所有聖物書冊 及神父手札 貯之一籠 寄在他家 未幾寄籠之家 又有駭機 將欲搬回本家 而恐爲部將輩所獲
정아우구스티노는
이 때 시세가 이미 변화하여 재난의 불길이 점점 맹렬하게 타오름을 보고,
자기 스스로 도저히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가지고 있던 성물과 책과 신부의 편지 등을 농 하나에 넣어 가지고 다른 집에다
맡겨 두었는데, 그 농을 맡긴 집도 발각될 가능성이 있고,
또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본 집으로 도로 운반해 오려고 했으나
부장들에게 빼앗길까 두려워서
使任多黙者 扮作賣柴的 裡籠以枯松葉 十九日夕陽時 從街上負來 籠大薪薄不類樵擔
임토마스라는 사람을 시켜 나무 장수로 가장하고 농을 마른 솔잎으로 싸서,
19일 석양 무렵에 짊어지고 거리로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농은 크고 솔잎은 엷어서 아무래도 땔 나뭇짐 같지가 않았습니다.
漢城府別肉禁亂見之 疑其爲私屠牛肉(私屠之禁絶嚴) 迫到官開看都是聖敎書像 及神父筆札 府官大駭 遂將籠與人 押送捕廳
마침 한성부의 별육 단속하는 사람이 이것을 보고,
그것이 밀도살한 쇠고기가 아닌가 의심하여 임토마스를 관청으로 끌고 갔습니다.
농을 열어보니 모두가 성교에 관한 책과 성상과 신부의 편지였으므로
한성부의 관리들이 크게 놀라 마침내 농과 사람을 다 포청으로 압송하였습니다.
是如火上添油 禍難因此而大 書籠被捉後 敎友們莫不震驚 恐不保朝夕 過了十餘日 寂無動靜
이것은 불에다 기름을 끼얹은 것과 같아 환난이 이로 인하여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책을 넣었던 농이 압수된 이후에
교우들은 모두 놀라 몸을 떨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했는데,
십여 일이 지나도 아무런 동정이 없어 조용하였습니다.
二月初 捕盜大將李儒慶移職 新官申大顯視事 盡放滿獄背敎之人 惟崔多黙兄弟 崔若望 任多黙不放
2월 초에 포도대장 이유경이 다른 직책으로 옮겨가고,
새로 임명된 신대현이 집무하자 옥에 가득차 있던 배교한 사람들을 죄다 석방하고 오직 최토마스 형제와 최요한과 임토마스만 석방하지 않았습니다.
或云將欲杖殺 或云方議遠竄 外間緝捕暫停 敎友們喜出望外 庶乎其無事 時有少北朴長卨 老論李書九 南人崔顯重 相繼上疏 極 聖敎 請以逆律論罪
혹은 말하기를 장차 장살할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멀리 귀양보낼 의논을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외부에서도 검거가 잠시 중지되니 교우들은 기뻐하였고,
이대로 아주 아무 일이 없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였습니다.
이 때 소북의 박장설, 노론의 이서구, 남인의 최현중 등이 계속해서 상소하여,
극단적으로 성교를 비방하면서 역률로 논죄하기를 청하였습니다.
幷論申大顯輕治之罪 大妃震怒 繫大顯于吏 移捕廳所囚四人于禁府 國法朝士及逆賊 禁府治之 捕廳專管盜賊 庶民有罪 刑曹治之
아울러 신대현이 교인들을 가볍게 처벌한 것을 죄로 몰아 논란하였습니다.
대비가 크게 노하여 신대현을 이조에 가두고,
포도청에 가두어 두었던 네 사람을 금부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국법은 조정의 신하와 역적의 죄는 금부에서 다스리고,
포도청에서는
오로지 도둑을 관장하고, 서민의 죄는 형조에서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敎友皆庶民 而屬之捕廳者 用治盜律也 移之禁府者 論以逆律也 二月初九日 下李家煥 丁若鏞李承薰洪樂敏于禁府
교우들은 다 서민이어서 포도청에 수감되어 있는 자는 도율을 적용 받고,
금부로 옮겨간 자는 역율로서 논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2월 초아흐렛날,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을 금부로 하옥시키고,
十一日 捕權哲身丁若鐘 一邊申飭捕廳 從前放送之人 盡行追捕 將驪州楊根所囚諸人 解赴禁府 京鄕知名之敎友 無一人得免
11일에는 권철신, 정약종을 체포하였으며 한편,
포도청에 단단히 경계하여 전에 석방한 사람들을 모두 다시 체포하게 하고,
아울러 여주와 양근에 가두어 둔 여러 사람을 금부로 압송해 오니,
서울과 지방의 이름 있는 교우는 한 사람도 이 난을 모면한 이가 없었습니다.
道路上 邏卒橫馳 晝夜不絶 禁府及兩捕廳及刑曹獄 皆塡塞不能容云矣 二十四日 葛隆巴全家被捕 此後 士族婦女被捕者甚多 而皆不得詳聞
길에는 나졸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아니하고 널려서 이리 달리고 저리 뛰며,
금부와 양 포도청과 형조의 옥은
모두 빽빽이 차서 더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24일 골롬바의 온 가족이 체포되었고,
그 후로 사대부집 부녀자도 체포된 이가 많았습니다만 자세히 들은 바는 없습니다.
鄭奧斯定到官 官問書籠來歷 奧斯定認爲己物 官將籠中書札 遂一究問 奧斯定緘口不答
정아우구스티노가 관가에 이르러, 관리가 농 속의 책의 내력을 묻자,
아우구스티노는 모두 자기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관리는 농 속의 편지를 내어놓고 하나하나 캐어물었으나,
아우구스티노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官送人問于家屬曰 汝夫汝父 只告神父之姓名居住 則必無死理 而甘受毒杖 終不開口 等家屬 應必知之 等須念家長之性命 從實直告 家屬俱以不知答之
그러자 관리는 사람을 보내 가족에게 묻기를 "너의 남편 너의 아버지가 단지
신부의 이름과 있는 곳만 말한다면 절대로 죽을 까닭이 없는 것인데,
독한 매질을 감수하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너희들 가족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가장의 목숨을 생각하여 바른대로 말하여라." 하였지만
가족들은 한결같이 모두 모른다고만 대답하였습니다.
於是公卿會義 論以大逆不道 二十六日 奧斯定及崔若望 崔多黙 洪方濟各沙勿 洪樂敏 李承薰 共六人一幷斬決
이에 조정에서[公卿會議] 대역부도의 죄로 판결하여 26일에 아우구스티노와
최요한, 최토마스, 홍프란치스코사베리오 (洪敎萬 1737∼1801 순교자),
홍낙민, 이승훈, 여섯 사람을 모두 참형에 처하였습니다.
此後又有九人斬決 而女子三人 一則葛隆巴 其二不知 男子六人 亦不知爲誰 似是崔伯多祿等 而傳聞未詳 不敢强定耳
그 뒤에 또 아홉 사람을 참형에 처하였는데, 여자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골롬바이고 다른 두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으며,
남자 여섯 사람 역시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최베드로 등인 것으로 짐작되나,
소문으로 전해 들은 말이 정확하지는 않아, 함부로 단정하지는 못하겠습니다.
驪州楊根所囚諸人 皆還送本邑斬決 而未及査實 不能條奏 總會長崔若望昌賢 中路人也 乙卯致命崔瑪弟亞之族姪
여주 양근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원경도, 정종호, 최창주, 임희영)
도로 본 고을로 돌려보내 거기서 목베어 죽였는데,
아직 사실을 조사하지 못하여 낱낱이 아뢸 수 없습니다.
총회장 최창현 요한은 중인으로, 을묘년에(1795) 순교한
최마티아의 (崔仁吉 瑪弟亞 1764∼1795 순교자) 족질입니다.
家傳眞實之訓 聖敎到東 首先進敎 平和謹愼 公明精勤 二十年如一日 表樣純粹 言辭簡當 人或 疑 或遇患 心甚憂悶 一見其面 則自覺所遭之不大不難
그는 참된 가르침이 전해 내려오는 집안에서 자라 성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여 몸가짐이 편안하고 화목하였으며 언행을 공정하게 힘써
20년을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도 순수하고,
말은 간단하면서도 정의로워서, 누구든지 의혹이 생기거나 환난을 당하여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할 때에는
그의 얼굴을 한번만 보아도 자기가 당면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일이 아니요
어려운 일도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更聞數言 則胸次釋然 講道詳明有味 雖談說天然 不圖悅聽 而人皆樂聞 不知厭倦 入人 深 聽之者大有神益
다시 몇 마디 말을 더 들으면 가슴이 시원하게 활짝 열리게 하였으며,
도리와 강론도 자세하고도 분명하여 깊은 맛이 있었습니다.
비록 예사롭게 말하며, 듣기 좋게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즐겨듣고
싫증이 나지 않고 사람의 마음 속 깊이 들어가므로,
듣는 사람에게 신심의 유익함이 아주 많았습니다.
順命謙遜 出於自然 旣無卓異之表 亦無瑕 之行 德望爲敎中第一人 人無不愛信 家在笠井洞 故敎中號爲冠泉
그가 천명에 순종하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함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므로,
남보다 뛰어나거나 다른 점도 없었고, 또한 흠잡을 행동도 없었습니다.
덕망이 교우들 가운데서 제일 높았으므로,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집이 입정동에 있었으므로 교우들 사이에서는 호를 관천으로 불리었습니다.
鎭之廉聞湖中也 已知崔冠泉爲敎中領袖 但不知其名與居住 故不能捕獲 至是見窘難將大 避住敎友家 辛酉正月初五日 體氣不平 不得已還家調攝
조화진이 충청도를 염탐하여 최관천이 교인들의 영수임을 알았으나 단지
그의 이름과 있는 곳을 몰라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사태가 이에 이르러 최요한은 박해가 크게 벌어질 것을 알고
다른 교우의 집으로 피해 있다가 신유년(1801) 정월 초닷샛날
몸이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서 몸조리를 하였는데,
初九日夜半 金汝三導捕盜部將 到家掩捕 囚之捕盜廳 十餘日後 受治盜棍十三度 杖時屛氣伏地 如死人一樣 杖後 官數罪 蹶然而起 講明聖敎十誡
초아흐렛날 밤중에 김여삼이 포도부장을 인도하여 와서 덮쳐,
체포되어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10여 일 후에 치도곤 열 세 대를 맞았는데, 매를 맞을 때는 기절하여 땅에 엎드려 그 모양이 마치 죽은 사람 같더니,
매질이 끝난 다음 관리가 그의 죄목을 헤아리자,
넘어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성교의 십계명을 강론하여 밝혔습니다.
官曰汝旣孝敬父母 胡不行祭 答曰請審思之 就寢之時 雖有旨味 必不能嘗 已死之人 安能享飮食乎 官不能答 遂命下獄
관리가 말하기를, "네가 부모에게 효도로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밤에 잠을 잘 때에는 비록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맛볼 수가 없지 아니하오?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고 마실 수가 있겠소?" 하니
관리는 대답하지 못하고, 마침내 명령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自後無所聞 與丁奧斯定 同日被斬 時年四十三歲 丁奧斯定若鐘 性直而志專 詳密過人
그 뒤에 아무런 소식을 못 듣겠더니,
정아우구스티노와 같은 날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43세 였습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성품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세고,
무엇에서나 자상하고 세밀한 것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嘗有學仙長生之志 誤信天地改闢之說 歎曰 天地 改時 神仙亦不免消融 終非長生之道 不足學也 及聞聖敎 篤信而力行之
일찍이 선도를 배워 오래 살 생각이 있어서,
엉뚱하게 천지개벽설을 믿었다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천지가 변하고 바뀔 때에는
신선도 역시 없어짐을 면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은 이것도
영원히 사는 길이 아닐 것이므로 배울 것이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성교를 듣자 그는 독실하게 믿고 힘써 실행하였습니다.
辛亥之窘 兄弟親友 少有全者 而獨不撓動 拙於俗論 而 喜講論道理 雖當疾病飢乏之時 若不知其苦者然
신해년(1791) 박해 때 그의 형제와 친구들 중에서
믿음이 온전한 사람이 드물었는데, 오직 그만이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사를 이야기함에는 서툴렀으나 성교의 진리를 강론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비록 병들어 괴롭거나 굶주림을 당했을 때에도
그 괴로움을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或不明一端道理 則寢食無味 全心全力而思之 必至融通而後已
그러나 혹 한가지 조그만 이치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먹고 자는 것을 잊고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생각하여 반드시 분명한 깨달음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雖在馬上舟中 總不斷黙想之工 見有愚蒙者 盡力訓誨之 至於舌疲喉痛 而少無厭倦之意 雖甚愚鹵者 鮮有不明
그는 비록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있거나,
언제나 묵상의 공과를 그치지 않았으며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을 보면 혀가 굳고
목이 아프도록 힘을 다해 가르치고 깨우치게 하면서도
조금도 싫증내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비록 아무리 어리석고 둔한 사람이라도
그와 있으면 깨치지 못하는 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嘗爲敎中愚者 印國諺文 述主敎要旨二券 博採聖敎諸書 參以己見 務極明白 愚婦幼童 亦能開卷了然 無一疑晦處
일찍이 그는 교우들 가운데 무식한 이들을 위해 우리나라의 한글로『주교요지』
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널리 성교의 여러 가지 책에서 인용하고
자기의 의견을 보태서 지극히 쉽고 분명하게 설명하여 어리석은 부녀자나
어린아이들이라도 책을 펴 보기만 하면 환히 알 수 있고,
한군데도 의심스럽거나 모호한 데가 없었습니다.
緊於本國 更勝於 神父准行之
그래서 신부도 이 책이 이 나라에서 꼴과 땔나무보다도
(중국의 교리책『성세추요』로 해석도 가능함) 더 요긴하다 하여,
간행을 인준하였습니다.
積年宿學 習與性成 每見交友 寒暄之外 卽陳講論 終日 無暇旁及他談
정아우구스티노는 여러 해를 두고 깊이 학문을 쌓은 것이 아주 습관과 성품으로
생활화되어 매번 교우를 만나면 안부 인사 정도만 하고,
강론을 시작해서 종일토록 힘써서 미처 다른 이야기를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或得自己所未通者一二端 則滿心歡喜 積讚不已 或有冷淡糊塗者 不肯聽講 則不勝缺然悶然之意
그는 혹 자기가 아직 모르던 것을 한두 가지 알게 되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해서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혹 신심이 식어버려,
태도가 분명치 아니한 사람이 강론을 듣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서운해하고 딱하게 여기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人問各端道理 如探囊取物 不煩思索而滔滔不竭 反覆辦難 未嘗少窮 所言皆排比次序 無或錯亂 而精奇超妙 詳細的確 固人之信 熾人之愛
사람들이 별의별 도리를 다 물어도 그는 마치 호주머니 속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고 말이 끊어지는 일이 없었으며,
계속해서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는데도 조금도 막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은 다 차례가 갖추어져 논리가 어그러지거나 혼란하지 아니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뛰어나 오묘함을 넘어서며, 자세하고도 정확하여
사람들의 믿음을 굳게 하여 애덕을 더욱 왕성하게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