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작은왕국 강화도 마니산에 봄을 뿌리고 오다

김성조 2013. 3. 18. 10:43

마니산(472.2m)

작은왕국 강화도 마니산에 봄을 뿌리고 오다 

 

계절이 3월하고 중순을 넘어 남녘엔 봄꽃 소식이 전해 오건만

여기 당진은 아직 아침나절엔 옷깃을 여미어야 한다

순천 산모임에서 강화도 마니산을 가기위해 이곳 당진을 지난다 하여 행남도 휴게소에 기다리니

봄기운 가득싣고  버스가 들어왔다 

 

강화도는 옛고려의 수도 송악(개성)과 조선의 수도 한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큰 섬이라

고려때 부터 왕래하며 몽골침략 때는 왕이 몽진을 하기도 하여 역사가 깊은 섬이다

많은 학자들의 귀향지 이기도 하니 문물이 성행했던 곳이다

이조의 25대 임금 철종도 어릴때 강화도에 유배되어 살다가 임금이 된 강화도령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강화도의 위치는 휴전선을 안고 흐르는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과 마주한 서북전선 이다

당진 인천을 잇는 서해고속도로는 평일에 산업용 차량으로 붐비기로 유명한데

일요일 아침은 그래도 수월하게 강화에 도착하여

초가로 지붕을 씌운 식당에서 강화도산 순무김치를 곁들인 아침을 먹고 산행을 시작한다

 

 

강화도 주산 마니산(472.2)은 마리산(摩利山), 마루산,두악산(頭嶽山)이라고도 한다

마니산에 오르는 길은 세곳인데 주 코스인 화도면 주차장과 함허동천 야영장 그리고 정수사(精修寺)에서 오르는 경로가 있다

정수사에서 오르는 길이 가장길고 또한 암반지대로 험난하다

우리는 오늘 정수사 코스를 A코스 화도면 코스를 B코스로 하여 오른다

 

 

산의 초목엔 아직 봄의 기운은 없고

남녘에서 올라온 우리들에게 봄내음을 맡으러 기웃 거리고 있어

각자 담아온 양대로 뿌려 주었다

여기도 곧 봄이 오고 그 기운이 일거던 북쪽 바다건너 동토에도 전하라는 간절한 마음을 빌어본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마루금에 오르니 정상으로 이어지는 1KM 남짓한 길이 모두 바윗돌 길인데 사람이 너무 많아 정체가 많이 된다

때로는 우회를 하면서 두 시간 여 만에 마니산 정상에 도착 하였으나

인증사진 한 장 못찍고 건너편에 있는 참성단으로 가니 오히려 더많은 인파 그래서 이산은 "많이산"이 된다

 

 

 

 

참성단(塹城壇:사적 136)은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 한다

지금도 개천절이면 제례를 올리고, 전국체육대회의 성화가 채화된다.

옛 기록에 보면 "참성단의 높이가 5m가 넘으며, 상단이 사방 2m, 하단이 지름 4.5m인 상방하원형(上方下圓形)으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여러 차례 개축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제단 옆에 홀로 지킴이 소사나무는 천영기념물(502)이라 한다

소사나무는 분재로 많이 키우는데 나무는 자체가 분재이다

하산길은 화도면으로 직하강 길인데 돌계단이 많아 오르는 사람이나 내려오는사람이나 힘에부치기는 마찬가지다 싶다

 

 

 

 

 

산행 완료후 강화의 역사와 문화 탐방에 나서는데

철종이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용흥궁

철종의 할아버지는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아버지는 전계대원군이다

철종은 19년간 외방에서 살았고, 즉위 직전까지 5년 간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헌종이 후사가 없자 안동김씨 순원황후가 원범(철종의 이름)을 덕완군으로 봉하고 양자를 삼아 수렴청정을 하니 60년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이어진다

 

 

 

 

 

1900년에 준공된 한옥형의 성공회 성당

성당이란 표현은 로마가톨릭교회(천주교)에서 쓰이는데

성공회에서도 교회를 성당으로 부르는 데는 성공회가 현 로마 카톨릭에서 종교개혁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이고

성직자와 교구제도가 가톨릭과 유사하며

7부성사(세례,견진,성체,고해,신품,혼인,병자) 등 전례 또한 가톨릭과 같다

크게 다른점은 사제도 결혼 할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새교황의 선출로 가톨릭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는 때라 좀더 알아보면

성공회(聖公會) 16세기경 영국에서 갈라진 개신 교파인데  

지금은 전 세계 165여 개국에 신자는 약 8 5백만 명이다 이라 한다.

영국의 헨리 8세가 이혼을 하려 하나 로마교회법상 이혼이 불가 하다 하여 갈라진 것이라 하나 이것이 진짜 이유는 아니고 권력화된 로마교회로 부터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정치적인 결과라 봐야 할 것이다

 

 

 

고려궁지(사적 제133)는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1232(고종 19)부터 1270(원종 11)까지 39년간 사용한 궁궐터이다.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었고 궁궐의 뒷산도 송악(松岳)이라 했다 

 

외규장각(外奎章閣) 1782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 이다

정조는 외규장각이 설치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內奎章閣, 내각)이라 하고,

각각의 규장각에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병인양요(1866)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이 규장각을 불태워 전각이 소실되었다.

이 결과로,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儀軌)를 비롯한 340여 책의 문서 및 은궤 수천 량이 약탈되었다.

약탈된 문서들을 정부가 꾸준히 반환을 요구하여 일부를 영구임대 형식으로 일부 들여온바 있다

 

 

 

다음 들린 곳이 강화 문학관인데 고전문학이다

조선중기 양대 학파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두 거대한 산맥이 있지만

조선 후기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 1649~1736)를 시조로 하여 강화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독특한 학문적 경향을 가진 강화학파가 있다

 

 

 

 

문학관 내에는 강화학파의 진골은 물론 강화도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해남대흥사의 대웅보전의 명필 원교이광사도 이곳 출신이고 그의 사촌 이광명이 정제두의 사위라서 후학이 되었다

 

 

송강 정철은 말련에 강화에서 죽었다 하여 소개 되었고

 

광양의 유명한 학자 매천 황현은 강화출신 이건창과 절친이라 하여 소개되어있다

강화학파가 충의롭고 선비정신이 투철하여 불의에 타협하지 않아 정치에서는 항상 비주류가 된다

이건창도 암행어사를 할 때 너무 깐깐하니 오히려 모함을 받아 귀양을 자주하며

아예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한다

광양의 매천 황현과의 교류는 황현이 과거보러 갔었는데 초시 성적이 월등 함에도

시골출신이라 차석으로 밀리자 2차는 응하지 않고 내려왔다 한다

이때 성품이 비슷한 이건창등과 교제를 하여 강화에 자주 들렸다 한다

강화학파는 정인보에서 끝이나고 현대문학으로 이어진다

상세한 이야기는 아는바도 부족 하지만 지면도 있고하니 그만하고

풍물시장으로 가서 밴댕이회에 술이나 한잔 하자..^^

 

2013. 3. 17